의병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32
한자 義兵運動
영어공식명칭 Righteous Army Movement
이칭/별칭 의병항쟁,의병투쟁,의병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6년 2월 11일 - 영해의진 결성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6년 3월 - 영덕의진 결성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6년 3월 - 영릉의진 결성
종결 시기/일시 1896년 8월 3일 - 영덕의진 해산
종결 시기/일시 1896년 8월 14일 - 영해의진 해체
종결 시기/일시 1908년 11월 18일 - 영릉의진 해체
발생|시작 장소 영해의진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영덕의진 -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송천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영릉의진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지도보기
성격 국권회복운동
관련 인물/단체 영해의진|영덕의진|영릉의진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민병들의 대일 투쟁.

[개설]

한말 의병운동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을 전후해서 일어난 전기 의병, 1905년 을사늑약(乙巳늑약)을 전후해서 일어난 중기 의병, 1907년 고종(高宗) 광무(光武) 황제 강제 퇴위 및 한국군 강제 해산 등을 계기로 일어난 후기 의병으로 구분된다. 당시 영덕 지역의 전기 의병으로는 1896년 2월 11일 영해(寧海)에서 일어난 이수악(李壽岳)영해의진(寧海義陣), 1896년 3월 영덕(盈德)에서 일어난 김건(金健)·신운석(申運錫)영덕의진(盈德義陣)이 있다. 중·후기 의병으로는 1906년 3월 신돌석(申乭石)영릉의진(寧陵義陣)이 대표적이다. 특히 영릉의진은 신돌석이 탁월한 지휘력과 전투력을 발휘했던 탓에 일본군도 가장 두려워하며 경계했던 의병 부대였다.

[역사적 배경]

전기 의병은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략한 갑오변란(甲午變亂)을 계기로 서상철(徐相轍)이 안동의병(安東義兵)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1895년 8월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고,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개혁이란 미명 아래 그해 11월 단발령(斷髮令)을 시행하면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보수 유림들은 ‘국모에 대한 원수를 갚을 것[討賊復讐]’, ‘복장과 두발을 변형하지 말 것[保形保髮]’을 주창하였는데, 그 뜻이 어느 정도 관철되자 스스로 해산하였다.

반면, 중기 의병은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고,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것에 대해 국권을 지키고자 시작하였다. 후기 의병은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국권 수호의 마지막 보루인 군대마저 강제 해산 당하자 일어난 대일 전쟁이었다.

[경과]

1896년 전기 의병 때 영덕에서는 영해의진영덕의진이 일어났다. 먼저 영해의진은 1896년 1월 22일 영해 지역 사족들이 설치한 집강소(執綱所)를 기초로 2월 11일 지금의 경상북도 창수면 인량리에서 결성되었다. 이들이 의병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3월부터이다. 이어 4월에는 50~60명의 병력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기암리 보기암(洑基岩)[복기암(伏奇岩)이라고도 함]에서 영덕의진과 함께 일본군을 물리쳤다. 영덕의진은 1896년 3월 설립 당시에는 김건이 대장이었으나, 3월 13일 이후로는 신운석이 의진을 이끌었다. 영덕의진은 청송의진과 협조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하였다.

중·후기 의병 중에서 가장 활발했던 것은 신돌석영릉의진이다. 영릉의진의 활동은 크게 전반기[1906년 4월~1907년 9월]와 후반기[1907년 9월~1908년 9월]로 나누어진다. 전반기 영릉의진은 울진·삼척 방면의 일본인 이주 지역을 공략하여 일제의 침탈을 저지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토벌 작전이 본격화되면서 태극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결과]

영해의진은 1896년 8월 14일 지금의 영덕군 병곡면 사천리에서 관군의 습격을 받고 패전하면서 위축되었고, 이후 정부의 명령에 따라 스스로 해산하였다. 영덕의진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함께 6월 3~4일 오십천 남천쑤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경상북도 지품면 신양리로 후퇴하였으나 다시 관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후 대장 신운석이 체포되고 8월 3일 처형되면서 의진도 종결되었다.

영릉의진은 장기간 존속하였으나, 1908년 이후 일본군의 대규모 토벌 병력 증대와 정부의 ‘귀순법(歸順法)’ 시행으로 병사들이 이탈하면서 무력화되었다. 그런 가운데 대장 신돌석도 피살되면서 와해되었다.

[의의와 평가]

의병운동은 일제의 침략과 그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정부 관료들을 몰아내어 나라와 백성을 굳건하게 지킬 목적으로 일어난 국권회복운동이다. 의병운동은 1895년부터 10여 년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특히 영덕에서는 평민부터 유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이 무렵 지역 인사들의 국권 수호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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