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412
한자 高麗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김현라

[정의]

고려시대 경상남도 밀양시 지역의 역사와 문화.

[고려 전기의 밀양]

1. 행정

고려는 성종 대에 이르러서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즉 성종 2년(983)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이어서 14년에 다시 전국을 4도호부 10도로 구분하였는데, 지금의 경상도 지역은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의 3도로 나누어졌다. 신라 통일기에 붙여진 지명인 밀성군은 경주와 함께 영동도에 속하였다. 이와 함께 밀성군은 밀주(密州)로 고쳐 격을 높이고 군수를 자사(刺使)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주위의 여러 군현을 속현으로 두었는데, 속군으로 창녕군, 청도군, 그리고 속현으로 현풍군, 계성현, 영산현, 풍각현이 있었다. 청도군은 신라 때의 속현인 오악, 형산, 소산이 합쳐진 것이고, 영산현은 종래의 속현인 상락이다. 그러나 창녕군과 현풍, 계성, 풍각 3현은 모두 새로 귀속된 것이다. 밀주 자체가 큰 고을이고 2군 4현을 관할하는 밀주자사의 권위는 매우 높았다. 1018년(현종 9)에 밀주자사는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로 개칭되었지만, 권위는 여전하였다.

2. 병종과 군액

『고려사(高麗史)』에 실린 주현군에 의하면 밀성도(密城道)의 병종과 군액은 다음과 같다. 보승군은 245인, 정용군은 427인, 일품군은 532인이다. 이러한 군액은 인근 고을에 비하여 많은 숫자이다. 즉 울주도내, 양주도내, 금주도내 등은 밀성도내의 반 정도에 해당한다.

3. 산세

밀양의 산세에 관한 여러 시가 남아 있어 참조가 된다. 임춘의 「제영남사」, 「영남사죽루」 등의 시에서 밀양은 문화와 예절이 뛰어나 선비가 많기로 촉군과 같다고 하였다. 또는 풍속은 순후하여 예의의 고장이라고 하였다.

[고려 후기의 밀양]

삼별초 항쟁과 관련한 시기에 발생한 반란으로 밀성군은 1276년(충렬왕 2)에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고 계림(鷄林)[지금의 경주]에 소속되었다. 고려시대 부곡은 군현제보다 차별을 받는 지역이었다. 물론 고려 후기의 부곡은 고려 전기보다는 차별의 정도가 완화되었지만, 밀성군이 반란의 죄목으로 귀화부곡으로 강등되었다는 점만 보더라도 이는 형벌에 준하는 가혹한 처사였다. 이에 따라 밀성군민은 일반 군현민보다 많은 수탈을 당하였다.

이후 충렬왕 대에 장군 박의(朴義)가 왕의 좌우 측근들에게 뇌물을 주고 밀양에 소복별감(蘇復別監)을 두게 하였다. 소복별감의 역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후기 전쟁 피해를 입은 지역의 소생과 회복을 위하여 파견된 임시관직으로 추정된다.

1285년 군으로 환원되었으나 곧 현으로 강등되었다. 한때 양주(梁州)[지금의 양산]를 폐지하여 밀주에 합쳤으나 1304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밀성군이 공양왕의 증조할머니 박씨(朴氏)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밀양 지역의 농민 항쟁]

무신 집권기에 밀양 지역에서 여러 차례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다. 농민 항쟁은 서북 지역의 조위총의 난에서 시작되어 남쪽으로 확대되었다. 처음 봉기는 1200년(신종 3) 5월 밀성의 관노 50여 명이 관의 은기를 훔쳐 운문산으로 가서 적군에게 합류하였다는 것이다. 밀성 관노 반란의 배경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도 개경에서 일어난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이 주도하는 노비 반란이 계기가 되었으리라 본다. 또한 밀성 관노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인 1193년(명종 23)에 경상도의 김사미·효심이 운문산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밀성 관노가 투탁한 운문적은 바로 김사미·효심의 반란군들을 가리킨다. 즉 김사미·효심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에도 운문산에는 농민 항쟁 무리가 존속하였고, 여기에 밀성 관노들이 합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밀성 관노들이 은기를 훔쳤다는 것에서 경제적 이유가 컸다고 보인다. 밀성 관노가 운문적에 합류하였다는 것은 노비와 농민의 항쟁이 결합된 것으로서, 당시 신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우한 처지가 노비와 농민들을 규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삼별초 항쟁이 발생하였을 때 밀성군민(密城君民)이 합류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의 밀성군민인 방보(方甫)·계년(桂年)·박평(朴平)·박경순(朴慶純)·경기(慶祺) 등이 고을 사람들을 모아 삼별초군에 호응하려고 밀성군의 부사(副使) 이이(李頤)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고, 청도(靑道)까지 장악하였다. 정부에서 안찰사(按察使) 이오(李敖), 금주방어사(金州防禦使) 김훤(金晅), 경주판관(慶州判官) 엄수안(嚴守安) 등이 반란을 진압하러 오자, 일선현령(一善縣令)[일선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인 밀성 사람 조천(趙阡)의 배신으로 방보 등은 죽임을 당하고 난은 평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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